🌐WCC(세계시민통화) 백서
이 문서는 책 『선택된 윤리』의 부록 “WCC”입니다. 문서에서 언급되는 n.m장(e.g. 9.2장)은 『선택된 윤리』의 본문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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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빈곤에 대한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우리가 마법처럼 가난한 사람의 은행 계좌에 돈을 이체할 수 있다면 문제를 바로잡는 데 드는 비용이 아주 적다는 사실이다.
『위대한 탈출』, 앵거스 디턴
충분히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아서 C. 클라크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이었다. 책 내용은 그것으로부터 크게 벗어났지만, 이 책에서 다룬 몇 가지 주제로부터 인공지능 시대에 유용할 법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것은 자동화된 복지 기능이 내장된 화폐다. 과거에는 현실성이 없다고 여겨졌겠으나 근래의 급격한 기술 발전은 이를 크게 허황되어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미국에서 출판되는 책 중 80%는 100부가 채 팔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근시일 안에 다시 책을 쓸 수 있는 행운은 요원해 보인다. 이 책의 주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제시하기보다는 지금 있는 것을 설명해 보는 것이지만, 나는 어울리지 않는 쿠키 영상(Credit cookie)을 너저분하게 덧붙이기로 했다. 위 아이디어에 관심이 동하지 않았다면, 마저 읽지 않더라도 책의 완결성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복지란 9.2장에서 살펴본 최저한의 경제적 결과 보장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화폐에 복지 기능을 넣을 수 있을까? 마법을 쓸 수 있다고 상상해 보자. 헝가리산 용의 꼬리 가시로 만든 지팡이를 휘둘러 지갑에 마법을 건다. 매일 밤 12시 종이 울리면 마법 돈이 짜잔 생기는 마법이다. 이제 같은 마법 지갑을 여러 개 만들어 전 국민에게 나누어 준다. 기왕 마법을 쓰는 김에 전 세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겠다. 완성이다. 더 멋들어진 이름이 생각나기 전까지, 돈의 이름과 단위는 일단 WCC(세계 시민 통화)라고 해 두자. 먼 옛날 WCC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냥한 마녀를 화형 시킬 것이 아니라 마법 지갑 생산에 동원해야 했을 것이다. 용과 마녀가 멸종한 오늘날, 우리에게는 마법 같은 정보 기술이 있다.
WCC는 기본적으로 컴퓨터 통신을 이용해 구현되는 디지털 통화다. 다행스럽게도 조금만 익숙해지면, 사람들은 별 무리 없이 모니터에 나타나는 숫자를 돈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진 상태다(8.2장). 나부터도 일상생활에서 지폐나 동전보다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리고 신용카드 대금이 지불된 것을 확인하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은행 계좌의 잔액을 조회하곤 한다. 마치 형체가 없는 돈과 지갑을 가진 느낌이다. 비교적 역사가 긴 인터넷 뱅킹에다, 2009년 등장해 인기를 끈 암호화폐 덕분에 전자 지갑이라는 개념도 더 이상 생소하지 않게 되었다.
WCC에는 두 종류의 (전자) 지갑이 필요하다. 하나는 일반 지갑이고 하나는 한 사람이 한 개만 가질 수 있는, 이를테면 시민 지갑이다. 매일 밤 12시가 되면 각 시민 지갑에는 1WCC가 생성(발행)된다.(만약 모든 지갑에서 WCC가 발행된다면 사람들은 마구잡이로 지갑을 만들어 더 많은 돈을 얻으려 할 것이다.) 추가로 시스템 운영에 지리적 편애가 있다는 오해를 피하고자 국제우주정거장 등의 시간대를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겠다.
이런 식으로 매일 WCC가 발행되면 돈의 양이 무한정 늘어나므로 화폐의 구매력이 떨어지는(물가가 오르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이다. 각 시민 지갑에서 발행되는 1WCC의 가치도 시간이 갈수록 작아진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매일 일정 비율의 돈을 모든 지갑에서 소멸시킨다. 여기에서는 기억하기 쉽게 매일 1,000분의 1(0.1%)이 사라진다고 하자.(만약 돈이 소멸되지 않는 지갑이 있다면 사람들은 가진 돈을 모두 그 지갑에 몰아넣을 것이다. 또한, 일정 비율이 아니라 일정 금액이 각 지갑에서 소멸한다면 이번에도 한 지갑에 돈을 몰아넣는 일이 발생할 것이고, 누진적인 비율로 소멸한다면 반대로 가능한 한 많은 지갑으로 분산시킬 것이다.) 여기까지 정리해 보면 매일 밤 12시(UTC+0),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일반 지갑: 보유한 WCC의 0.1%가 소멸한다.
시민 지갑: 보유한 WCC의 0.1%가 소멸하고, 1WCC가 발행된다.
자정 직전 보유한 지갑을 모두 합해 0WCC를 가진 사람의 잔고는 1WCC(0×0.999+1)가 된다. 100WCC를 가지고 있던 사람의 잔고는 100.9WCC(100×0.999+1)가 된다. 1,000WCC는 1,000WCC(1000×0.999+1) 그대로, 10,000WCC는 9,991WCC(10000×0.999+1)가 된다.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표는 『선택된 윤리』 p.275를 참고)
1,000WCC를 기준으로 그보다 적게 가진 사람은 잔고가 늘어나고, 많이 가진 사람은 잔고가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화폐의 보유를 담세력(9.3장)으로 보고 세금을 부과해, 그 세금으로 복지제도를 운영하는 것과 같은 모양새다. 직간접적으로 보유한 화폐의 양과 경제적 결과가 비례할 것이라는 가정에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덧붙여, 오랫동안 같은 과정이 반복되면 모든 지갑의 총 잔고는 사용 인구(시민 지갑의 개수)×1,000WCC로 수렴할 것이다.(증명은 『선택된 윤리』 p.276을 참고)
과거 밀턴 프리드먼이 주장했던 부(負)의 소득세나, 더 최근으로는 2020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앤드루 양이 공약한 기본소득을 떠올린 독자도 많을 것이다. 구체적인 구현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WCC와 비슷한 아이디어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심지어 시간에 따라 줄어드는 돈마저 약 100년 전 사업가 질비오 게젤에 의해 ‘Freigeld’라는 이름으로 제안된 바 있다.
지폐나 동전을 사용하는 현재 화폐에 이 시스템을 접목하려면 매우 거추장스러워진다. 수없이 많은 공무원을 고용해 개개인이 보유한 모든 화폐의 양을 매일 조사하고 세금을 물린다고 상상해 보라. 막대한 행정 비용(9.1장)이 발생하고, 사람들은 세금 징수원의 눈을 피해 현금을 숨겨 조세를 회피할 것이다.
이에 반해 WCC에는 대응하는 지폐나 동전이 없고 정해진 시각에 자동으로 일어나는 소멸을 피할 수 없다. 8.5장의 내용을 떠올려 보자. 한사람이 재화를 판매해 번 돈은, 그 사람의 재산으로 보유되고 있다가, 다른 재화를 생산하는 자본에 투자되거나 최종 재화를 구입하는 데 사용된다. 소멸하는 WCC의 성질은 사람들의 이윤동기(8.2장)와 결합해, 돈이 보유되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투자와 소비를 활성화시킬 것이다. 번 돈을 사용하지 않고 가지고 있을수록 손해이기 때문이다. 마치 초유체 헬륨이 담아둔 용기의 벽을 타고 흘러나오듯, WCC에서는 디플레이션이 일어나도 유동성 함정을 빠져나오는 새로운 상(Phase)의 돈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프랑스에서는 봉건영주(Seigneur)가 화폐를 발행했다. 이로부터 정부가 화폐를 발행해 얻는 이익을 세뇨리지(Seigniorage)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1달러(100센트) 지폐를 인쇄하는 비용이 10센트라면 90센트(100-10)가 정부가 갖는 세뇨리지가 되는 것이다. WCC는 지금까지 (민주주의 국가라면) 정부에 위임되어 있던(7.3장) 화폐 발행권을 시민들이 되돌려 갖는, 이를테면 시민본위제 화폐다. 시민 한 명 한 명이 평등하게 화폐를 발행하고, 세뇨리지를 차지한다. 또한, 발행과 소멸이 정보 기술을 이용해 자동으로 이루어지므로, 공무원의 부패(7.3장)가 개입할 여지와 행정 비용이 적다.
나는 WCC가 다른 획기적인 아이디어의 힌트가 되는 것만으로 크게 만족할 것이다. 오히려 여기까지 쓴 그대로 WCC가 실현된다고 하면 걱정이 먼저 앞설 것이다. 특히 실질 복지 지출을 결정할 변수인 소멸 비율의 적절한 설정을 포함해,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는 전방위적인 연구, 검토, 대비가 선행되어야 한다. 사생활 보호, 정전과 같은 비상시에 대한 대책 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산더미 같지만, 여기에서는 몇 가지만 살펴보고 넘어가자.
먼저 떠오르는 비판점은 아직 이 행성이 한 가지 화폐를 쓸 만큼 통합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최적통화지역 이론에 따르면, 어떤 지역이 정치・경제적으로 통합되고 각종 교류가 자유로울수록 같은 화폐를 사용하는 이점이 커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교류와 통합이 보다 활발해질수록 WCC를 사용하는 이점도 더 커질 것이다.
솔직히 말해 WCC의 이용 범위를 전 세계로 제안한 것은 순전히 상상해 보는 즐거움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이미 정치적으로 일원화된 한 국가 안에서 비슷한 시스템을 구현하는 것이 그나마 가망이 있다. 만에 하나 국제적 규모로 실행된다고 하더라도 이미 충분히 통합된 국가들 사이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협력에 유리한 구조가 마련되어 있고, 실제로 활발한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주요 선진국들 말이다(9.4장). 돈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그것을 돈으로 받는 사람들의 생산성에서 나온다(8.2장). WCC가 보다 큰 복지 효과를 가지기 위해서도, 다시 말해 시민 지갑에서 매일 발행되는 WCC가 더 큰 가치를 갖기 위해서도 자본이 축적되어(8.1장) 생산성이 높은 주요 선진국들에서 법정 통화(8.4장)로 인정될 필요가 있다.
일단 WCC가 주요 선진국의 법정 통화로 지정되었다고 할 때, 이것이 전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기 위해서는 그 외 국가의 사람들도 시민 지갑을 발급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경을 넘어 활동하며 사람들의 신원을 보증해 줄 국제기구를 설립해야 한다. 시민 지갑의 발급은 행정력이 충분한 선진국에서는 크게 어렵지 않지만, 정부를 신뢰하기 어려운 국가에서는 문제가 된다. 선진국에는 운전면허나 여권같이 신원을 증명할 수단이 이미 잘 마련되어 있어 그 시스템을 그대로 시민 지갑 발급에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신뢰하기 어려운 정부에 시민 지갑 발급을 맡긴다면 신원이 증명되지 않아 시민 지갑을 발급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거나, 세뇨리지를 노린 부패한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신원을 대량으로 위조할 수도 있다. 이 같은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신뢰할 만한 국제기구(또는 기구들)가 필요한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해당 기구가 원활히 활동할 수 없는 폐쇄적인 국가들까지 WCC에 참여하는 것은 어렵다.
이외에도 다양한 기술적 고려사항이 존재한다. WCC의 구현에는 기존의 클라이언트-서버 구조를 이용할 수도 있고, 최근 유행하는 분산원장기술을 도입할 수도 있다. 또한, 디지털 통화의 이점을 살려 필요한 만큼 소수점 아래로 최소 단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1mWCC(0.001WCC)를 최소 단위로 사용하다가, 화폐 구매력이 커지면 1uWCC(0.000001WCC)로 변경하는 식이다. 이외에 시스템의 부하를 막기 위해 소액의 송금 수수료를 설정하거나, 처리능력이 충분해지면 폐지할 수도 있다.
발행・소멸 주기는 하루(24시간)가 적당해 보인다. 이 주기가 너무 길면(예컨대 1년), 마치 뜨거운 감자를 떠넘기듯 소멸 시각이 임박한 때 거래와 송금이 급증해 시스템에 부하를 줄 것이다.(또한, 긴 주기는 다른 사람의 세뇨리지를 착취하려는 불한당에게 유리하다. 발행주기가 길면 협박과 수금을 하고 돌아다니는 일을 더 가끔씩만 해도 되므로, 그 비용이 덜 든다.) 반대로 주기가 너무 짧으면(예컨대 1분), 이 또한 시스템의 부하가 크고 계산이 복잡해져 사람들의 혼동이 클 것이다. 333생존법칙에 따르면 인간은 공기 없이 3분, 물 없이 3일, 음식 없이 3주 정도 생존할 수 있다고 한다. 재해 등 위급 상황에 사람들이 식수 같은 필수재(9.2장)를 구매할 수 있도록, 발행・소멸 주기는 3일 이내에서 결정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이때 하루는 가장 흔한 계약(8.4장)의 시간 단위로써 사람들의 혼동이 덜하고, 무엇보다 매우 직관적이다.
WCC가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화폐로써 WCC의 가치는 사용자들의 생산성에 비례한다(8.2장). 그리고 반복되는 혁신과 기술 개발(8.3장)로 인류의 생산성은 놀라운 속도로 향상되었고, 되고 있다. 이때 WCC의 총 잔고는 사용 인구×1,000WCC로 수렴하므로, (화폐유통속도 등이 안정적이라고 가정하면) 장기적으로 1인당 평균 재화 생산량이 증가함에 따라 화폐의 구매력이 높아지는(물가가 낮아지는)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이다. 돈의 총량이 정해져 있으므로 재화가 많이 생산될수록 같은 금액으로 살 수 있는 재화가 많아지는 것이다.
WCC의 장점 중 하나는, 그 구매력이 어떤 수준을 넘어서면 WCC 사용에 필요한 장비(인터넷에 연결된 스마트폰)를 사용자들에게 따로 보급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1WCC의 가치가 1 미국 달러에 이르렀다고 하자. 이것으로 소득이 없는 사람도 한 달에 약 30달러를 쓸 수 있다. 저렴한 스마트폰과 최소한의 인터넷 접속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다. 지갑에서 발행된 WCC를 거의 다 스마트폰 유지에 지출해야겠지만, 인터넷에 접속하고 송금이 가능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과 비교가 무색한 생산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커다란 자본(8.1장)이된다. 인류가 지금껏 쌓아온 수많은 정보와 유용한 모델에 접근할 수 있는 도구이자 편리한 거래수단을 얻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지구 어디서든 인터넷에 접속 가능해야 한다는 희망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희망 사항의 전망은 꽤나 희망적이다. 우선 WCC는 (폐쇄적 국가를 제외한) 인간의 모든 거주지에서 인터넷 접속에 대한 지불용의(8.2장)를 증가시켜, 생산자들이 시장에 진입해 서비스를 제공하고(8.5장) 관련 기술을 개발(8.3장)할 유인을 만든다. 게다가 이미 인류의 기술은 지구 표면 전체에 인터넷을 제공할 수 있는 수준에 다다라 있다.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 당장, 내로라하는 IT 기업가들이 저궤도 위성 인터넷 시장에 앞다투어 진입하고 있으며, 위성 안테나는 가방에 들어갈 정도로 작아졌다. 마찬가지로 가방에 들어가는 크기의 태양광 패널과 배터리에서는 안테나와 스마트폰을 구동할 전력을 얻을 수 있다. 머지않아 하늘이 보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WCC의 가치가 3달러까지 오르면 절대적 빈곤이 사라진다. 2015년, 유엔 전문 기구인 세계은행은 절대적 빈곤의 기준이 되는 국제 빈곤선(International poverty line)을 하루 1.9달러(2011년 PPP 기준. 덧붙여 이 부록에 언급된 달러는 모두 기준 연도 2011년의 실질 미국 달러로 하자.)로 갱신했다. 2012년 자료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약 9억 명 정도가 절대적 빈곤에 처한 상태다. 시민 지갑에서 매일 3달러어치 WCC가 발행된다면, 그중 1달러를 스마트폰 유지에 사용한다고 해도 2달러가 남아 절대적 빈곤이 해결된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필수재를 구입하고 생산성을 높여 경제적 악순환을 벗어나는 데 사용될 수 있다(9.2장).
물론 WCC가 긍정적 결과만 내놓을 리는 없다. 정부가 제 역할을 못 하는 지역에서는 재산을 지키기 위해 9.3장의 강변 마을처럼 자경단을 운영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 빈약한 상상력으로도 사람들의 세뇨리지를 갈취하는 폭력 조직이나, 아이들을 돌보기보다 세뇨리지를 가로채는 데 급급해 열악한 시설에서 원아의 사망마저 은폐하는 고아원 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처럼 WCC를 도입한다는 선택은 긍정적 결과와 부정적 결과가 모두 포함된 세상을 만들어낼 것이다(2.2장). 그런데도 WCC 덕에 재능을 키운 천재가 국제적인 규모(9.4장)로 막대한 긍정적 외부효과를 발생시킨다면(9.2장), 화폐 보유량이 많아 복지 지출의 대부분을 부담할 주요 선진국 국민들 입장에서도 손해를 보는 투자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WCC는 인공지능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생산자들은 토지, 노동, 자본과 같은 생산 요소를 투입해 재화를 생산한다(8.1장). 이때 생산자는 투입되는 생산 요소를 줄이거나, 더 저렴한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 기술을 개발하고 혁신을 시도한다(8.3장). 그렇다. 대체되는 생산 요소에는 노동도 포함된다. 예컨대 녹음 기술이 없던 시절의 가수는 거래할 때마다 매번 노래를 불러야 했지만, 지금은 노래를 한 번 녹음해 두면 다시 부르지 않고도 몇 번이고 팔 수 있다. 사람들은 주머니 속에 1,000곡의 노래를 넣고 다닌다. 이처럼 인류는 더 적은 수고와 노동으로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직업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새로 생겨났다. 컴퓨터(Comput-er)가 본래 직업의 이름이었다는 사실은 이제 호사가들의 이야깃거리로나 남았다.
문제는 점점 더 빨라지는 혁신에 사람들이 대처하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발생한 혁신이 전파되는 속도, 혁신이 발생하는 빈도 둘 다다. 고도로 발달한 교통과 통신은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고 있는데, 시장이 통합되면 혁신의 전파 속도가 빨라진다(8.3장). 오늘날 세계 어디선가 발생한 혁신은 무역(9.4장)과 통신망을 통해 수개월 내로 다른 대륙까지 전파된다. 게다가 현재 대부분 국가가 가입된 특허협력조약이 국제적으로 특허권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9.4장)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서 이미 개발된 발명품을 중복해서 개발할 필요가 없다(9.1장).
무엇보다 과학은 배제성을 부여하기 어려운 기초 학문(9.1장)이다. 언어(2.4장), 교통, 통신을 통해서, 전 세계 사람들은 최신의 과학을 공유하고, 함께 연구해 동시다발적으로 연구결과를 내놓고, 그 결과를 또다시 공유한다. 이렇게 공유된 유용한 과학 이론은 새로 개발되는 공학과 기술의 기반이 되고(2.5장), 발전한 기술은 더 정교한 과학 실험과 검증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기술은 그때까지 축적된 지식과 기술을 통째로 딛고 발전하므로, 그 속도가 마치 복리 이자가 붙는 것처럼 기하급수적으로 가속된다. 청동기 시대(기원전 약 3300년)가 철기 시대(기원전 약 1200년)로 바뀌는 데는 2,000년 정도가 걸렸지만, 라이트 형제가 동력 비행기를 개발하고(1903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사람을 보내기까지는(1969년) 10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통합된 시장과 공유된 과학은 시간이 갈수록 더 잦은 창조적 파괴(8.3장)를, 그리고 그에 따른 기술적 실업(9.2장)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압제적 정부라면 민간의 혁신과 생산성 향상을 규제해 기술적 실업을 회피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겠다. 예컨대 녹음된 음악의 재생을 금지하면 가수의 생산성이 떨어지므로 일거리가 늘어난다. 무분별한 음악 재생으로 발생할 소음을 예방한다거나 아무 때나 음악을 들으면 그 감동이 덜해질 거라는 게 듣기 좋은 입법 취지(7.1장)가 될 것이다. 19세기의 경제학자 프레데리크 바스티아가 지적했듯 모든 사람의 오른손을 잘라 내면 효과적으로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다.
만약 혁신이 주는 효용 증가를 계속 누리면서 사람들이 경제적 악순환에 빠지는 것도 방지하고 싶다면 메타선진국처럼 복지제도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적절한 복지제도는 기술적 실업을 맞닥뜨린 시민이 다른 일거리를 탐색하는 과정을 보조한다(9.2장). 혁신을 금지하는 국가, 복지제도를 도입한 국가, 그리고 기술적 실업에 아무 대처도 하지 않은 국가 중 어느 곳이 미래의 선진국(사람들이 살고 싶은 국가)으로 남을지 관찰하는 것도 흥미로워 보인다.
인공지능은 이 거대한 추세의 연장(延長)에 불과하다. 다만, 사람들이 우려하는 점은 이번에는 대체되는 일거리의 범주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까지 확대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모든 분야에서 인간 노동의 가격이 그것을 대체할 로봇을 구입, 임대하는 비용보다 비싸진다는 뜻이다. 이것을 기술적 인류 실업이라고 부르자. 생산 비용을 줄이려는 생산자들(8.3장)은 로봇을 투입해 재화를 생산할 것이고, 재화를 더 싸게 사려는 소비자들(8.2장)은 로봇이 생산한 재화를 구입할 것이다. 그렇다면 로봇을 소유, 임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시장에서의 거래에 참여하기 어렵게 된다. 우선 자신이 생산자인 시장에서 퇴출되는데, 생산자로서 새로 진입할 수 있는 시장도 없다. 소비할 돈을 벌지 못하니 곧 소비자로서의 시장에서도 퇴출된다. 인류 전체가 소비할 재화를 노동의 고통 없이 생산할 능력을 갖추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그 능력이 사용되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비극이 일어나는 것이다.
1WCC의 가치가 30달러쯤 되면, 매일 30달러어치 재화를 소비하는 데 만족해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제법 생길 것이다. 추가적인 소득으로 얻는 효용보다 추가적인 노동이 주는 고통이 더 크다고 판단한 사람들이다. 300달러라면 아예 일하려는 사람이 드물 수도 있다. 8.3장에서 소개한 조지프 슘페터의 말처럼 “만약 실업자들의 개인적 생활이 실업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실업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기술적 인류 실업을 포함해, 어떤 혁신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9.2장). WCC의 또 다른 장점은 각종 혁신의 시기와 영향력을 예측할 필요가 없다는 데 있다. 앞서 보았듯 WCC의 구매력은 인류 전체의 재화 생산량과 자동으로 연동된다. 만약 1WCC가 300달러까지 오르는 동안 일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다가 결국 극소수만 남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 남은 노동력만으로 적어도 인구×300달러어치의 재화가 매일 생산, 소비되고 있다는 뜻이다. 정의(定義)에 따라, 효용은 노동이 아니라 최종 재화의 소비에서 나온다(8.1장).
WCC의 실현은 세계 시민들의 거대한 협력을 필요로 한다. 만약 성공한다면 시민들에게 꾸준히 경제적 기회를 제공하며, 절대적 빈곤과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기술적 실업에 대처할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다.
ISBN 9791160547160 | 135*210mm | 288쪽 | 렛츠북